탁자 위에 놓인 검은색 볼펜은 오늘도 조용했다.

반쯤 마른 잉크 심은 더 이상 쓰여질 문장을 기다리지 않는 듯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이 전부인 양, 주변 먼지 한 톨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낮 동안 창을 통해 쏟아진 햇빛은 펜의 플라스틱 몸체에 반사되어 잠시 빛을 냈다가 이내 사라졌다. 간간히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는 펜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흘러갔다.

펜의 용도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리고 어제, 그저께도 펜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어떤 중요한 이야기도, 시시콜콜한 낙서도, 펜의 몸을 거쳐 종이 위에 남겨지지 않았다. 세상은 펜 없이도 잘 돌아갔고, 펜은 세상의 움직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조용히, 그리고 아주 평범하게,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존재가 잠시 멈춰 서 있는 순간이, 세상에는 아주 많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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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채널을 고르는 리모컨을 손에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