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4의 게시물 표시

티비채널을 고르는 리모컨을 손에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티브이는 꺼져 있었고,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불규칙하지도 않았다. 손에 들린 리모컨은 플라스틱 재질이었고, 오래되어 버튼의 글씨들이 조금 지워져 있었다. 나는 리모컨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는 건전지 커버가 있었고, 그 밑에는 작은 나사가 하나 박혀 있었다. 나는 잠시 건전지가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마시다 남은 물컵이 놓여 있었다. 컵 옆에는 광고 전단지가 몇 장 쌓여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세탁소 할인 쿠폰이었다. 나는 쿠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 뭘 먹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저 먹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계속 소파에 앉아 있었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검은색 볼펜은 오늘도 조용했다.

반쯤 마른 잉크 심은 더 이상 쓰여질 문장을 기다리지 않는 듯했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이 전부인 양, 주변 먼지 한 톨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낮 동안 창을 통해 쏟아진 햇빛은 펜의 플라스틱 몸체에 반사되어 잠시 빛을 냈다가 이내 사라졌다. 간간히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는 펜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흘러갔다. 펜의 용도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리고 어제, 그저께도 펜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어떤 중요한 이야기도, 시시콜콜한 낙서도, 펜의 몸을 거쳐 종이 위에 남겨지지 않았다. 세상은 펜 없이도 잘 돌아갔고, 펜은 세상의 움직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조용히, 그리고 아주 평범하게,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존재가 잠시 멈춰 서 있는 순간이, 세상에는 아주 많을지도 모르겠다.